2019. 11. 29. 14:55 訃告
中曽根 康弘 元 內閣總理大臣 死去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11246386&isYeonhapFlash=Y&rc=N
이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처음 올렸던 포스팅이
https://angelusnobus.tistory.com/73?category=180145
하타 쓰토무 원 내각총리대신 사거 소식이었다.
나는 원래 죽음에 관심이 많다. 진칸이란 존재으 가장 본질적 특징중 하나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미래의 끝에는 소멸이 있고, 진칸에게 소멸은 죽음이다. 그 어떤 미래에 대한 생각조차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이므로 종국에는 죽음으로 수렴한다 할 수 밖에 없다.
글쎄다.
일단 나는 40넘게 처 먹은 주제에 아직도 은근 귀신이 무섭다. 작년 2월 야마구치 여행때 하기에서 묵은 첫날밤, 뇌리를 사로잡은 정체불명으 공포는 아직도 선명허다. 본격적으로, 8백만 귀신의 나라 일본에 온 첫날밤이라, 일종의 통과의례를 겪은 것일런지? 그 다음날인 이와쿠니에서부터는 잘 잤고, 그 뒤로도 잘 잤다만. 오히려, 귀신이란 존재를 꺼려하던 마음이 바로 그 하기의 첫날밤 이후로 정말 놀랍도록 사라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밤에는 킹무갓키으 미스터리 항목을 보는 것은 삼가하고는 있다만 이젠 밤에 혼자 잔다고 움찔, 하고 그럴 일은 없을게다. 마, 그렇다고 이제는 사라진 곤지암 정신병원같은데서 혼자 밤새라고 하면 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만서두.
이건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전부터 해 왔다. 진칸이란게 의식이 생생할 때와 의식이 또렷치 못할 때 - 무의식일 때가 다르게 마련이고, 상당부분 의식이란건 무의식의 표출인 면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를테면, 지금 악마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
라고 한다면? 글쎄 딱히 두려울 거 같지 않은디. 삶에 미련도 없고. 물론 죽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굳이 죽지는 않는다만, 죽는다고 해도, 적어도 의식이 또렷한 지금은 100%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완전히 전혀 두렵진 않을 거 같다. 아, 물론 아픈건 싫다. 죽어도 안 아프게 죽어야제. 그런데, 이건 고통이 두려운거지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니까 다른 이야기.
전에 김종필이 죽었을 때도 조문을 갔었고, 본의는 아니지만 노회찬이 죽었을 때도 조문을 갔고, 슨상님 돌아가셨을때는 물론이며 아빠 와 할머니 할아버지 말고는 제일 비통했던 노짱 죽었을 때는 조문만 5~6군데를 갔다.(5백만 조문객이 허수인 이유 ㅋ) 심지어 박지원 the 개눈깔 장군님 부인이 별세했을 때도 조문갔다. 박지원 장군님의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하는 의아해하던 의안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거야 뭐 한국인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일반적인 장례문화지만,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마다 산소에 가고, 설 추석에도 가며, 가급적이면 한식날도 산소에 가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기리는 사람이 많지만, 위대함에 비해 기리는 사람이 적은 김재규 장군님 묘소에도 대국절과 기일(1980년 5월 24일)마다 찾아모시곤 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라고 한다면 종교인들을 제외하믄, 아니 솔까 내가 지켜본 바, 상당부분의 종교인 - 그나마 철저한 교육을 통해 양성된 엘리트 요원인 캐쏠릭 신부 같은 경우를 포함해도 대부분은 성직관료, 혹은 자영업자더라. 닳고 닳아서 원래의 신심이란게 있긴 한지 의심스러운 사람이 많은디, 상당수의 종교인을 포함혀두 나만큼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거라고 자부헐 수 있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건 죽음때문이다. 아니라고 하는 것들은 삶알못이다. 여기서 의미가 있다, 라는 것은 중의적이다. 죽음앞에 한정된 삶이기 때문에, 삶은 그 자체가 가치가 있다, 라고 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있겠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마침이 없다면, 삶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가치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전적인 의미도 있을 것이다. 철학적인 의미라고 혀야허나. 나는 기본적으로 전자으 입장은 인정허지 않는다. 그건 가치편향적이거든. 사태의 가급적 본래 그 자체의 의미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존재와 소멸 혹은 부재라고 한다혀두 마찬거지. 그러나 앞서 "기본적으로" 라고 말헌 이유는 저런 대비쌍에서 어느 한 쪽이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믄
이해와 몰이해
에서는 왜 이해가 우위라는 태도를 취하는거냐? 라는 반론에 뭐라고 답혀야헐지 아직 모르긋기 때문이다. 왜냐믄 이해라는 것을 긍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삶을 더 향상시키는 것" 이기 때문인지라. 그런 점에선 학실히 나는 주지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나으 본질은 호사가, 힙찔이이고 그 방법론은 편향되지 않음을 넘어 어떤 특정 태도에 구애되지 않구 사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헌다, 라는 것에서 구허구 있기 땀시,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허지 않을 수 읎다.
사실, 이것도 좀 오모시로이해지는기, 저러한, 구애되지 않음으 태도는 현실에서는 니힐리즘, 허무주의적인 존재들에게서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 자신 허무주으적 태도가 읎다고는 몬허긋다. 삶에 가치가 있지 않다고 하는게 안 허무주의인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허무주으라고는 생각지 않는 이유는 일반적인 허무주의가 삶을 무의미화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인디, 나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아무 쓸모도 없고 제일 꼴값이라고 생각허는기 냉소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비웃는 자들. 그러나, 나는 의미를 비웃지 않는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의미를 비웃지 않는다니?
오히려 나는 의미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생명, 삶에 기반하지 않는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사실 그런 점에서 보면 종교인들하고도 통하는 면도 있다. 종교인들은 의미를 삶의 피안에서 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점에서 의외로 종교들을 보면 상당히 지성주의적인 면도 많다. 히브리즘 계통으 종교에서 지성주의적 신학과 신비주의적 신학으 끝없는 갈등은 그 자욱일진저. 그럼에도 역시 이들과도 다르다. 그들의, 삶의 피안에 대한 희구는 결국 우리가 겪고 있는 삶으 연장선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신이 인간을 닮아야하지? 그건 너가 인간이고 상상력이 인간수준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허무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삶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의미의 영역에까지 삶의 양상을 갖다 붙이려하는 꼬락서니가 역시 꼴값이라고 생각해서 종교를 경멸해 마지 않는 것.
요와 가케히키도 네마와시
가 아니고 냉소가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의미와 무의미의 준거를 삶에 두고 있다는 것, 여기서 지적인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되겠다. 사실, 이런 걸 정말 나만 생각했을거 같진 않구... 삶을 상대화하거나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생각한 사유가 있을 거 같긴 헌디, 이런건 깨나 고급 사유일 것인지라 나가 접해보진 못혔구... 하튼 나는 독자연구로 삶이란 것에 대해 대충 이러한 태도를 갖구 있다, 라는 것이다. 삶은 앎의 대상일 뿐이다. 랄까나. 왜 삶보다 앎이 더 위에 있느냐?
삶이, 존재가 사라지면 앎도 같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부재시에 둘은 동격이다.
그런데 삶이 존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존재시에 더 좋은 삶과 존재를 위해서는 앎은 필수적이다. 심지어 개돼지도 더 똑똑한 놈이 더 좋은 삶을 산다. 하물며 인간임에야.
대충 말 되지 않냐? 이렇기에 앎은 삶보다 더 우위있고 가취있는 행태인 것이다. 살아보니까 더 알고 더 이해하고 그런거 말고 가치있는게 없더라고. 빠구리나 뛰며 닥치는대로 사는 삶이라고? 더 잘 싸고 더 잘 박히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지 않냐? 먹고 놀고 살거라고? 먹을거에 대해 놂에 대해 더 잘 알지 못하면 잘 먹지도 놀지도 몬한다. 롯데리아나 애슐리 따위를 맛있다고 먹으러 다니는 삶의 가치가 타드샘플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삶만큼 가취있을수는 없는 것. 사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의 부재를 취향이라고 변명하는 행태는 내가 제일 꼴사나워 하는 것이기두 허구.
하튼 인간이 뭔가를 한다, 라고 할 때 앎과 무관한 건 없다. 성취와 업적을 남기는 것은 말할긋두 읎구, 막살고 놀려고 해도 알지 못하면 "잘" 막살지도 못하고 "잘" 놈팽이짓하지도 못한다. 조양은 따위가 호아킨 구스만의 삶에 비할 수가 있는가?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많이 정리허게 되었는디, 왜 나는 호사가인가? 라는 점이 많이 설명된 거 같다. 그리고, 중승근 강홍 같은, 한국인의 입장에선 쓰레기같은 정치인을 왜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하며 흠숭하고 있는가 같은 것도 마찬가쥐. 그는 더 잘 안 사람이고, 그 앎으로 나쁜 짓을 한 것과 무관하게, 그 앎은 더 높은 경지로서 그의 삶을 높였기에 가치가 있는 것. 사실, 그렇기에 나가 진짜로 주지주의 일변도였다면 개쓰레기였을 것이다. 주지주의, 앎의 크기라는 관점에 대해 나가 스스로 겨누는 도덕적 견제장치나 기준들이 있다. 근디, 그걸 쓸라믄 글이 하염없이 길어질테니, 그건 나중에 생각허구, 하튼 나는 충분히 이 사회에 지속가능한 형태로 지성주의 일변도로 흐르는 것은 스스로 조절허구 있다. 이건 내 지인들은 인정할 수 있는 것.
죽음에 관심이 많다, 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헷바닥이 길어졌다. 죽음을 생각한다, 라는 것은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믄 죽음은 산 존재로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 죽음전까지의 삶을 생각하는 것, 그리구 죽음 이후에 남은 존재들의 존속을 생각하는 것 이외에 산 존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산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이해하기는 커녕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죽음! 주지주의의 입장에선 엄청나게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초~ 카와이한... 이 아니고 초 예외적인 존재 아니겠는가? 알 수 없지만 있기는 한 것에 대해 느끼는 밑도 끝도 없는 호기심, 이란건데, 어찌보면 이는 알 수 없지만 있기는 한 것에 대해 느끼는 밑도 끝도 없는 공포와 방향만 다른게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공포만큼이나 나는 그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래서 자꾸 죽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죽은 자의 묘소에 찾아가보고 그러는 걸까. 정말 그런지는 단정은 못하겠지만, 그렇게 써 놓고 보니 뭔가 내 안에서 무언가 풀린다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원래는 중승근 강홍 원 나이가쿠소리다이진 사마의 삶에 대해 글을 써 볼라구 혔는디, 죽음 두 글자를 접하는 순간 감흥이 크게 일어 다른 쪽으로 글이 뽑혀나왔다. 하타 쓰토무 원 내각총리대신의 사거때는 그러지 않었는디, 그건 그 당시 나가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었기 때문이기두 허구 지금보다 미숙허기두 혔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역시 죽은 사람이 나에게 어떤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가 라는 점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중승근 강홍 원 내각총리대신은 나가 메우 흥미롭게 생각하고 좋아혔던 인물이기 땀시, 더 많은 감정과 상념을 불러 일으켰달까나.
내일은 지인과 일본대사관에 가 볼 생각이다. 혹시 빈소가 있을까 혀서. 지인이 점점 사회적 명사가 되어가믄서, 이미지관리를 하기 땀시, 이런 쓰레기같은 짓! 에 동참하기 곤란한 처지긴 하기에 밝힐 순 읎지만 ㅋㅋ
나카소네 야스히로 선생님. 그 동안 선생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는 더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선생님으로 인해 즐거웠던 기억들은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