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여행기 쓰지도 못한 채... 왤케 쓰기 싫냐... 일이라는 생각이 드니 만사 귀찮다.


어지간해서는 내년 4월에 천황폐하 즉위식 참관목적으로 무사시국 여행을 가는, 어지간하지 않다면 올 겨울에 와카야마 여행을 갈 가능성이 있는데... 그 전에 쓸지 어떨지는 모를 일. 기록을 남기긴 남겨야 겠다고 생각은 한다만.


복잡한 생각은 갔다와서 하자.

Posted by 앙겔루스노부스

피지라... 아니 피지알에 쓴 글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7379


귀찮아서 쓸까 말까 했는데, 역시 쓰는게 좋을거 같아, 그리고 피지알에서 그 양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조문갔다 올 사람이라곤 저 밖에 없을 거 같아 굳이 남겨봅네다.


김종필이란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한다면 그 또한 이래저래 말이 많을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 양반을, 저 자신 한국현실에서 꽤나 진보적인 입장에 있음에도 싫어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내적으로는 그 처세술의 문제입니다. 처세술이란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가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까딱하면 천길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십상인 정치판에서 살아남는다 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인 것이지요. 정치인으로서의 수완이 있으니까 가능하다, 라는 것. 저는 기본적으로 실력있는 사람을 좋아하는지라. 김종필의 처세술에 대해서라면 한국정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토달 사람은 없을테지요.

정치외적으로는 교양인으로서의 면모 때문입니다. 시서화에 능했고, 여러 잡기에도 능했으며 능글능글한듯 하면서도 뼈가 있는 그의 언행들은 그가 다분히 문과적인 깊이가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고, 저 자신 문과로서 그런 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달까나요.

과도 많고 비판할 부분도 많지만, 가는 날에 그런 이야기하는 것도 야박한 일이니 일단은 덮어두는 것으로.


오는 6월 28일이 제 할머니 기일인데, 25일날 가고시마여행을 가는지라, 산소에 미리 갔다오기로 마음먹은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같이 가기로 한 양반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양반이 갑자기 김종필이 죽었다고 말을 하더군요. 뉴우쓰를 확인해보니 오늘 아침에 사망했다는 소식들이 타전되던... 정치적으로 그 양반과 같은 편에 섰던 적은 없고, 역사에 큰 죄를 지은 인물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 양반이 아니었더라면 김대중이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할 수도 없었던 일이기도 하기에, 그걸로 군사반란에 대한 죄를 참작해주기로 한다면, 위에 말씀드린 이유로 나름대로 의미있는 인물이라고 보았던지라, 기분이 착잡해지더군요. 어쨌거나 저는 소위 3김(물론 저도 김종필이 감히 양김에 비할바라고 보진 않습니다만, 양김이 구시대와 맞닿는 고리역할을 꽤나 크게 했던 자체는 사실이니)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 거의 내내 정치를 봐 왔고, 그 한 축이면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양반이 떠났다 하니... 가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측면과 어쨌건 한 시대가 끝나는 역사의 현장을 지킨다, 라는 생각하에, 산소에 갔다 오는 길에 빈소에 들르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섰십니다. 하루종일 간 사람들 보러 오가는 날이 된 꼴인...^^

산소는 충북음성이라 강변터미널에서 버스타고 갔다와야 허는디, 빈소가 마침 거기서 다리 하나 건너면 있는 아산병원이라 하니 코스가 딱 잡히더군요. 산소갔다 오는 길에, 걸어서 잠실철교를 건너 병원에 들러 조문하는 것으로. 산소를 갔다오니 저녁 6시쯤이 되었고, 뙤약볕도 많이 저문지라 선선한 강바람 맞으면서 건너갔습니다.

전에 김대중이 사망했을 때, 세브란스 병원의 빈소에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았고 줄을 서서 조문을 해야했기에 한참 기다렸었는데... 김종필이 이름있는 사람이라곤 하지만, 김대중처럼 확고한 지지기반과 수 많은 존경하는 사람들을 지닌 것도 아니고 만년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위신도 비할바는 아니었기에, 그 정도는 아니겠거니, 하긴 했는데... 가 보니까, 일반인 조문은 저 말고는 거의 없는 거 같습디다. 제 앞에 줄 서 있던 사람도 한 세 팀정도? 식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보아허니 대개 아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느라 오래 있는 각이었고.

빈소는 장례식장 3층이었는데, 장례식장 입구에 KBS와 MBC등의 차량이 와 있더군요.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가려니 2층부터 줄지어서 수십명의 기자들이 앉아있고. 아마 빈소를 방문하는 유명인사들 취재하는 게 주 목적중 하나였던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누가 지나가나 고개를 들어 보기에 기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영광을... 후후~ 내심, 유명한 정치인들 실물로 볼 기회도 있지 않을까, 생각혔는디, 아쉽게도 제가 조문다녀간 그 시간대엔 그런 사람은 없더군요.

장례식장이란게 구경하러 가는 곳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장례식장에 볼 거리라면 화환의 행렬들일테죠. 생전에 어떤 사람들과 얼마나 폭 넓게 인연을 맺고 살았나, 하는. 아마 제 장례식장에는 화환 하나도 오지 않을...-- 마, 당연히 한국정계 최고 거물중 하나였던 사람의 장례식장이니 화환이 즐비했죠. 기업회장, 정치인, 사회유력인사, 일본쪽 화환도 있었고. 기억에 남는 화환이라면 이명박화환이 어쨌거나 전직대통령이라고 장례식장 제일 안쪽 빈소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는 거하고, 어쨌거나 충청도가 낳은 인물이다보니, 신격호나 정몽구 화환 틈에 있을 계제는 아닌거 같지만, 아직 당선자에 지나지 않는 충남도지사 당선자 양승조 이름의 화환이 생각보다 높은 서열로 있었다는 것과 전국적 지명도는 거의 없을 게 확실한 충남지방지 중도일보에서 온 화환이 또 꽤 높은 서열로 있었다는 정도... 좀 더 찬찬히 구경하고 싶었는데, 장례식장에서 그것도 고인과 실질적인 관계도 없는 찌질이가 돌아다닐 일은 아니지 싶어서 제대로 못 본게 좀 아쉬웠네요. 박근혜 화환은 왔나 찾아보고 싶었는디.

빈소앞에 서니 예의 착잡한 기분이 깊어지더군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앞에 섰다는 것에서부터, 시대를 풍미한 사람의 지난 날이 -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기분이었달까나. 깊은 숨을 쉬고 두번 큰절 한번 반절하고 상주들하고 맞절 한번 하고 나왔습니다. 밥 먹고 가라 그러는데, 역시 얻어먹을 계제는 아닌 거 같고 끼어봐야 개밥에 도토리 신세인데 뭘 얻어먹냐, 하는 심뽀에 그냥 나왔네요. 전에 삼성병원 장례식장 밥은 맛있었기에, 아산병원 밥은 어떤지 궁금하기는 혔습니다만.

아산병원에서 성내역까지 걸어가는 길이 좀 됩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오자니 또 이 생각 저 생각 들더군요. 그 길을 걷다보면 바로 앞에 선명히 잘 보이는게 롯데타워입니다. 그걸 보니 또 신격호 화환도 생각이 나더군요. 산 송장이기야 이 양반이 훨씬 더 한데 어쨌거나 명줄이야 이어지고 있다고 화환을 보낸거 보면 산 사람들 일 같지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달까나. 글구보니 이건희 화환도 못본. 현재 '그' 바닥에선 가장 유명인일텐데 말이죠. 아직 먼 일이기야 하겠습니다만, 노무현 보냈고 김대중 보냈고 김종필 보냈고 신격호 보낼거고 이건희 보낼거고 문재인도 언젠가는 보낼거고 아직은 꼬꼬마같은 김경수도 보낼거고 그렇게 보내고 보내다 보면 내가 갈 차례도 올테고. 결국 죽은 사람 빈소에 가는건 그 날을 위해서 가는 거라는 건 뻔한 생각이지만, 이렇게 직접 맞닥뜨릴 때마다 싱숭생숭해지는게 또 인지상정일테죠. 지금이야 멀었으니 죽는거 두렵지 않다 하지만, 죽음앞에 두고 어떨지는 또 모르는거고. 제가 죽은 사람 빈소 잘 찾아다니고, 신문(그 악독하다는 한겨레 봅니다)볼때도 부고란은 꼭 챙겨보는 이유도 그 기분이 뭔가 탐탁치는 않지만, 외면해서는 안될거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그 기분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착잡함과 역사의 착잡함이 착종되는 묘한 기분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유력인사가 날이면 날마다 가는게 아니기에, 이런 날의 기분은 그 자체로 독특한 경험이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다음엔 어떤 유력자가 갈 지 모르겠지만, 그 때도 어지간하면 참배하러 갈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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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원 내각총리대신으 조문을 갔다 오믄서 피지라... 아니 피지알에 쓸까 블로그에 쓸 까 고민혔었다.물론 그 이전에 쓸까말까가 더 실존적인 고민이었지만 블로그에 쓰믄 슨상드립부터 나으 평소스런 막나가는 글을 쓸 수 있응께. 근디, 갔다와서 피지라... 아니 피지알을 보니 김종필에 대해 좀 거시기한 이야기들이 횡행하는 것이 아닌가. 참교육... 까정은 아니고, 그랴도 좀 소프트하게 봤음 하는 면도 있지 시프서 피지알에 씀. 나으 개드립 본능을 억제해야 하는 것은 슬프지만, 세상은 언제나 선택과 방황.


근데 웃긴게, 댓글은 거으 안 달리는디 추천은 꽤 된다. 아니 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싫어하는 국민학생이야 읎긴 헌디, 이게 그리 칭찬받을 글인가? 해서 좀 의아. 왜 칭찬받는지 잘 이해가 안 갔는디, 대충 세 번째 댓글을 단 양반으 말을 들어보고 아, 그래서 칭찬하는건가? 하는 생각은 들었음. 물론, 나으 음흉하고 시커먼 속내는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다만, 그런걸루 치믄 김종필이 몇십배는 더 하지 않가서? 낄낄~


그런 것두 있지만, 아마두 죽은 사람이 모멸당하는 것이 좀 안타까웠는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으 심정을 대변해 줄 수 있는 글이 뒤야서 추천이 쫌 붙은거 아닌가 싶기두 허다. 모두가 다 싫어할리는 없잖은가? 물론 전두환같은 인간쓰레기는 모두가 싫어해야 하지만, 김종필은 그런 인물은 절대 아니니까. 그런 양반들이 대놓고 뭐라 하기는 그렇고 동조해주기도 껄쩍지근하지만, 속내를 풀어준 것에 대해 참 잘했어요, 해 준 면이 크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또 드는 생각이 세번째 댓글 양반 말 보고 드는건디, 확실히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구나, 라는 생각. 나야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실감 자체가 잘 안 드는 사람이다봉께,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거리낌이 없는디, 반대로 과문허지만 나가 아는 한 한국 사람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람들이라... 죽음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느낌도 있지 싶기두 허구 그렇다. 어쨌거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죽음과 거리를 두고 살기에, 그 속에서 사는 나는 그들이 그러는 것을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스레 인식하는 것이 생경하다믄 생경할 수 있을텡게.


물론 죽음이란 것을 자연스레 인식헌다, 라고 당당히 말할 정도로 이해나 생각이 깊은 것은 절대 아니긴 허다만 일단 지금의 이 글을 둘러싼 이야기들에서 보이는 것은 상대적일 지언정 뭔가 차이가 있긴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헌다.

Posted by 앙겔루스노부스

『3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헌디 인걸은 간데읎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사실 하기는 개성처럼 나라가 망해나간 도읍도 아니구, 일본은 운하나 간척사업을 중세부터 꽤나 한지라, 산천이 의구한 것만도 아니다. 일단 오늘 돌아볼 아이바가와 자체가 인공운하이기두 허니.


다만, 하기를 돌아다니면서 보니... 참 사람이 읎드라. 물론 마을에 인구는 없구 관광지이지만 비수기에 날씨도 우중충하고 비오는 날씨이니 사람이 없을법두 혔다만. 그 괴괴함이 더더욱 맘에 들었던 것인디, 오늘 편에서 돌아볼 부분이 괴괴함이 정점을 찍은 부분이다. 잘 전해질지 모르겠다만


글구 멋보다 나가 저 시조를 좋아함. 사바세계으 허무함을 저 만큼 잘 전하는 시조가 딱히 있으련가? 저와 댓구를 이루는 것이라믄 또한 이 문장일진저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매천야록으로 이름있는 매천 황현의 유언이다. 헬조센이 망하는 때에, 순사하면서 남긴 이야기. 사라져가는 것의 덧없음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렇게 엇갈리는 이야기가 있을수가. 그러면서 둘 다 높은 선비력으로 인해 극히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있지만, 빛도 어둠도 나름의 아름다움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할지도.


각설하고

여행기 들어간다 눈 벌려라


지난 화에서는 쩌그만큼을 이동혔다. 오늘편의 출발점은 아이바 가와.

아이바 가와(藍場川)은 하기의 인공수로, 운하이다. 애초에 섬나라라 수운이 발달할 여건이 갖춰졌던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를 맞아 전국적으로 물동량이 급증하고 인구가 늘어나믄서 수운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기본이야 당연히 연안수운이지만... 그 수운은 결국 도시안으로 들어가야 최종유통이 되는 것이고, 배에서 일일이 부리는 것보담은 당연히 배로 들어가는 것이 더 이익인 것. 윗 지도만 들여다봐도 하기라는 도시는 수운하기 참 좋은 곳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텐디, 그 발달한 수운의 인조 모세혈관이랄 수 있는게 아이바 가와이다. 이름이 아이바 가와가 된 이유난 藍이라는 것은 쪽빛을 말허는디, 염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색중 하나가 남색이었다. 그 남색 염색장이 아이바가와 일대에 많았고, 그 염색장(藍場 = 아이바)에서 흘러나온 물이 운하를 쪽빛으로 물들였기에 아이바가와라고 이름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윗 지도에서는 노오란 네모로 아이바 가와를 표시해놨는디

실제로는 이 지도에서으 파란 줄기가 대충 아이바가와의 핵심구간이다. 저거말고도 지류들이 더 있었던 걸루 아는디, 도시가 발달허구, 저런 전근대수준으 운하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는 물류여건이 갖춰지믄서 사라졌고, 지금 남은 부분은 대략 저 파란선에서도 일부이다. 사실, 아이바가와가 역사유적으로서 제대로 개발된 구간은 윗 지도에서으 우하단, 그니까 하시모토 강과 아부강이 갈라지는 지점에서부터의 일부구간이다. 그랴서 당초에 하기여행계획을 세울때는 지도의 중하단의 하기역에서 내린다음 걸어서 아이바가와를 보고 쇼카손주쿠와 민족영웅 이토히로부미의 집을 보러 갈 생각이었으나... 그랬다간 감당할 수 없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라, 포기허구 동하기역에서 내렸던 것.


오늘 올릴 아이바가와으 도심 부분은 어찌보믄 기능상으로는 아이바가와가 더 살아있는 부분이랄 수 있다. 여기는 주민들의 마을한복판에 있으믄서 배수로와 하수도 역할을 더 중점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라. 다만, 워낙 도시 중심부에 있다봉께 관광지로서으 꾸밈새는 영 아니다.


관광지로 꾸며진 상류부분은 이를테믄

이렇게 잎흐게 꾸며져있구, 나두 관광홈피에서 이런 모습들을 보고 하앍거리며 기대혔던 것. 그러나, 나가 답파한, 윗 지도상으 중류부분은 저렇게까지는 아니다.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봄직한 모양새가 없는건 아니지만, 관광지와 집앞골목이 같을 수는 읎는지라.


이런 에도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헤이세이시대으 내 여행으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아이바가와로 떠나봅시다.


아이바가와으 시작점이다. 확실히 위에 펌질헌 사진보다는 추레하고 수질도 쫌금...


다만 지난화에서으 주차장 한 구석 도자기구이터사진에서도 이야기혔지만, 집앞 하수구 개천이 알고보니 4백년전에 수운하던 물길이라더라, 라고 한다믄 간지나는 상황 아닐까? 글구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고 나에게는 소박한 지방소도시 마을길로서 충분히 잎흐게 보이기두 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분들도 있으실텐디사실 나가 그 의문을 가졌었는디이거 아무리 봐도 그냥 또랑물아닌가? 이런게 무슨 운하??? 라는 것이 사진을 보믄서 든 생각이었다. 그랴서 나름대로 찾아봉께, 에도시대으 아이바가와는 이것보다 많이 크고 깊었다고 헌다. 그 시대에야 주요 물류유통로이니 마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이제는 물류기능을 상실한 물건을 그냥 냅둘 이유는 없는지라,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이제 원형그대로 남은 곳은 없다, 라고 헌다.


글구 운하라고 하믄 수에즈 운하처럼 10만톤짜리 니미츠급 공모가 교행도 하는 큰 운하가 쉽게들 떠오르실텐디


아이바가와에서 운행한 배는 저러한 川船가와부네라고 불리우는 작은 화물, 여객수송선이다. 아직 가 보진 못혔다만, 사가현 야나가와라는 곳이 또 한 운하하는 도시인디, 저기는 저러한 가와부네를 현대식으로 만들어서 타고 유람하는 유람여행이 꽤 인기라구 헌다. 시마네현의 마츠에에도 있고, 사실 여기 하기의 해자는 상당히 큰 물길을 여전히 유지허구 있는지라, 앞바다까지 나가는 코스를 통트는 가와부네 유람선이 있다. 좀 있다 사진을 올리게 될 것. 다만, 이 날은 날두 흐리구 사람두 읎는데다 시간두 늦어서 탈 길은 없었다만.


하튼 저 수로보다 대략 두어배쯤 넓은 곳에 저 만한 배가 다닌다고 하면 충분히 납~ 득~ 할 수 있었다. 의문! 해소!


이런 시계는 하기시 관광국에서 놓은건지, 미용실 주인양반으 쏀쓰인지 모르겠다만 쏀쓰있는건 분명하다.

다만 역시 빛바래고 낡은...


생활속의 아이바가와라믄 바로 이런 모습들이랄까나. 윗윗윗 사진에 보믄 말씀드린대로 하수구가 많이 나와있다. 그랴도 역사유적인디 최소한으 정화는 하고 내보내는 거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글구, 아이바가와 위로 다리를 놓고 그 쪽으로 출입구를 놓은 집들도 많은디... 말 그대로 집을 드나들 때마다 역사를 넘나드는 것이렷다.


그 다리위에서 찍어봄. 미깡까지 배경에 잡히믄서 그랴두 쫌금 그럴싸혀 보이는 듯 싶지 않은가?


물길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나무으 모습은 나으 로망중 하나이다.


요시타케 요이치 사법서사 사무소라고 쓰여있는디... 사법서사라는 표현이 반가워서 찍어봄. 요즘이야 법무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만, 한국에서두 나 소시적까정은 사법서사라고 불리웠다. 행정서사, 사법서사... 한국이 확실히 일본으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그 영향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리라.


나 소시적까지만 혀두 동네에 후지칼라, 코닥칼라 이런 카메라 필름용품겸 사진관들 참 많었는디... 요즘은 디카열풍조차 폰카열풍에 밀려나버린 때문인지 볼 일이 읎다. 부도났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것두 같은디, 일본에서는 여전히 건재하시다. 예전같지야 못하시겠다만, 오따끄 문화 말고 예전만한게 일본에 있지두 않응께.


아이바가와으 여러 모습들을 죽 올려봤다. 집 문 나서는 데 저런 물길 하나 놓여있다믄 참 좋을거 같은디. 근데 장마철에 홍수나믄 못 나가는 거 아녀.


이런 활용법이 또. 출입구가 아니라 화단으로 사용하는 모습. 좀 지저분허긴 허다만.


시골마을에 가믄 마을마다 큰 나무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는 모습들 보셨는지 모르겠다. 이 넘이 아이바가와마을을 지키고 있는 나무인 듯. 일본이니까 당연히 신령하나 깃들어 계신 신목이겠지?


위에 사법서사 사진을 올렸는디, 가다보니까 바로 이 블록에 하기지방재판소가 있더라. 윗윗 사진이 그 모습. 밑 사진은 그 바로 앞에 있는 하기 야마구치 법률사무소. 여기는 어쭙잖은 사법서사따우가 아닌 변호사 야마구치 마사유키상께서 웅거하고 계신 곳.


으어... 계단 노무좋다능... 계단 밑으로 아이바가와를 넘어오는 다리도 하나 있었으믄 완벽했을건디. 그 다리를 건너 저 계단을 올라 2층으 나으 스윗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싸... 싼닷!!!


아이바가와의 큰 흐름이 굽이치는 곳이다. 은근 물이 남색같은 느낌도 든다?


일단 아이바가와 여행은 여기서 끗. 이 다리를 건너믄 하기 성아랫마을(城下町 - 죠카마치) 역사구역으로 들어간다.


무려 세계유산 되시겠다. 사실 여기서 가려고 맘 먹은 곳이 많었는디, 이 때 이미 오후 4시를 훌쩍넘어가던 시점이라... 진짜 겉핥기로 골목 몇개만 돌아보고 지나쳐와야혔다... 에도시대 초기부터 유신시대까지 이어진 죠카마치인디... 나으 주 관심사는 유신보다는 역시 에도시대으 모리가문과 관련된 것이고, 그건 산노마루(외성)인 이 곳보다는 저그 안쪽으 혼마루(본성)에 주로 있는지라 마음이 급했거든.




비록 미개한 반도인일망정 어쨌거나 나도 이진은 이진이니 이진칸에서 차 한잔 혔어두 좋았겠다만, 예산은 충분헌디 시간이 부족혀서 지나쳤다.


신사쿠 광장이라고 헌다. 유신지사중에서도 필두급으 인물이다.


별 거 없는 공터인 이유는 여기가 무슨 역사유적이 남은 곳이 아니라, 다카스기 신사쿠가 궐기한 장소여서임. 궐기하는 데 넓은 공터에서 하는 건 부득이한 일이긴 허다만, 이런 류으 구경거리 없는 역사유적은 좀 힘빠지게 하기는 헌다.


이 양반이 다카스기 신사쿠. 기헤이타이(奇兵隊)라는 신식군법으로 무장한 의용대를 이끌어 유신으 성공에 기여혔다. 그 기헤이타이는 그 후 일본육군의 한 뿌리가 된다사쓰마인들이 이 인물을 싫어합니다


이거 말고도 이 블록엔 봐야허는게 많었는디, 동선이 꼬이는 고로 바로 남으로 달린다.


나는 수로덕후이므로 수로사진들이 많은 것은 부득이. 서울으 경우 찾아보믄 자연하천에 기반한 수로들이 의외로 꽤 많긴 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을의 배수를 위해 놓은 인공수로가 당췌없는 것은 전부 지하화해서인가? 서울에 맨홀이 좀 많긴 하다만서두. 이렇게 지상수로로 놓았다믄 그 자체가 일종의 공원효과도 발휘했을텐데 여러모로 아쉬운 일.


지키자 헌법9조!

저 때만해도 그래봤자 야이 빨갱이 새끼야! 아아아아아! 하는 상황이었는디, 불과 두 달만에 아베가 날아가네 마네 하는 상황이 되다니 정치몰라요.


충혼비, 라고 허는디 누구의 충혼을 기리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더라. 기본이야 유신당시으 희생자들이긴 헐텐디, 아마 일본특성상 대동아전쟁 당시의 희생자들도 기릴 가능성이 높을 듯. 김치맨으로서는 반민족적 유물이랄까나.


이 물길은 아이바가와의 연장선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다. 이어져는 있는디... 명백한 건 하기성의 니노마루의 해자라는 점. 어차피 전시가 아니믄 화물선도 다 다니고 그랬것제.


여기에 온 이유는, 일본의 100명교에 포함된다고 하는 헤이안교(平安橋)를 보기 위해서이다. 다만, 이 또한 워낙 구석탱이에 조용히 묻혀있는 유물이다봉께, 잘 안 찾아져서 좀 헤맸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물 위에 드리운 나무가지는 예술이지라.


부정한 센징은 도마레! 도마레 라는 표현이 괜히 맘에들더라구.


잠시 헤맨끝에 찾았다~ 평안교~


애개... 이게 100명교라고...? 라고 생각하시는 당신! 작고 아담한 다리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군! 나가 기본적으론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헌다만, 작고 아담헌 것도 좋아하는지라... 오래된 옛 성을 둘러싸고 유유히 흐르는 해자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그 자체로 호젓함과 운치 그 자체 아닌가? 사실, 사진을 타이밍골라 찍어서 그렇지, 의외로 유동차량이 많았다. 성내와 성외를 잇는 다리가 이거 포함 3개밖에 없는지라... 다만, 동네 자체가 하기 시내에서도 구석의 외진 곳이고 해서 차가 좀 다닐 뿐 조용하고 호젓했던 것은 맞다.


이 다리가 가치가 있는 이유는 하기성이 축성되던 1600년대 초 당시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4백년 넘은 다리여서이기 때문. 딱 봐도 많이 낡은 티가 나지 않는가? 호젓하고 고즈넉한 모습과는 달리 묵직한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다리인 것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다리였다. 시간만 넉넉혔다믄 다리 옆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다리구경하고 있고 싶을 정도로.


평안교 기준 성 바깥쪽의 모습. 조용허구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이런 마을들을 돌아다니는 것이 진짜 일본여행.


이건 성 안쪽 모습인디, 역사경관지구라 그런지, 성 바깥쪽보다는 확실히 좀 있어보인다.


다리위에서 바라본 해자의 끝부분. 저그 끝에서 해자는 하시모토 강과 합류하여 일본해(동해)로 흘러든다.


야생의 시바가 나타났다!


시바를 처음보는 건 아니긴 헌디... 여태까지 본 시바와는 비교도 안되게 시바스러운 시바였다. 시바의 이데아 그 자체랄까나. 증말 말도 못하게 귀엽고 깜찍해서 딴에는 최선을 다해 찍었는데,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는 게 실로 안타깝. 쉬크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주인따라 평안교를 건너 달려가 부렀다. 역시 본토는 본토. 혼모노 그 자체.


다리도 다리지만 주변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평안교만이라면 이 정도로까지 감흥에 젖지는 않았을 것.


그랴두 역시 다리는 사람이 건너야 다리인 것. 자동차 한대와 할무이 한분이 나란히 건너더니 이내 자동차는 사라지고 할무이만 터벅터벅 걸어가신다. 할무이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여서 더욱 뇌리에 박힌 모습이랄까나.


평안교에 대한 안내문.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해석해보자믄, 하기의 세 성문중 하나의 출입구 역할을 혔다구 헌다. 1652년에 놓일 때는 목교였는디, 1764년에 지금의 석교로 놓인 모양. 에도시대 초기에 지금처럼 놓인건 아니구먼... 그랴두 3백년이라능! 길이 6미터 폭 4미터이니 좀 큰 차보다도 작은 다리이다. 물론 아름다움만은 어떤 차보다도 크다만~


다리를 건너 걸음을 서두른다. 여태까지으 현대에 지어진 것이 아닌, 진짜 에도시대에 지어진 집과 석축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성내이니까.


명륜관도 들렀어야 허는디, 못 들렀다. 하기번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한 곳이 명륜관인지라, 일본근대사에서는 메우 중요한 곳. 이 곳은 명륜관이 있던 옛터이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 명륜관은 앞서 지나온 아이바가와에서 두 블럭 아래쯤에 있는 깊고 어두운 곳에 있다.


사진이 흔들린 게 많은게... 이 시점부터 빗줄기가 강해지기 시작혔다. 근디 그 빗줄기가 렌즈에 튀어 자동초점 기능이 교란당해버린 바람에... 만약 쾌청한 날이었다믄 사진이 훨씬 좋게 나왔을 것이라는 점을, 이 다음날 쾌청한 날에 돌아다닌 이와쿠니에서 느꼈다. 그럼에도 올린 것은 여기부터 제대로 에도시대 사무라이 마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 앞서 쇼카손주쿠 편에서도 이야기혔듯이, 일본의 전통건축은 흰 벽이 많다. 가히 白壁 - 시로카베의 민족~


그런 와중에도 유난히 두드러지는 이 근사한 벽의 정체는?


바로 구치바家 주택되시겠다.


여기서 설 명 들 어 갑 니 다


이번 여행기가 방장경략인데에서부터 나가 모리 모토나리공과 모리가를 흠모하고 있음은 몇 번 말한 적이 있다. 모리 모토나리공이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가문은 홀로 서는 것이 아닌 법. 모리 모토나리공을 뒷받침한 훌륭한 가신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인물중에 쿠치바 미치요시라는 인물과 후쿠하라 사다토시라는 인물이 있다. 둘 다 모리 모토나리 공을 보좌한 훌륭한 무장들인데...


딱히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는 두 인물이지만 인상깊게 기억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신장의 야망을 하면서의 일이긴 허다. 모리 가문은 워낙 전국시대의 대세력이고 그런만큼 쟁쟁한 인물들도 많은데, 그 인물들의 대부분은 모리 일족들이고 일족외에는 그렇게 두드러지는 인물이 많지 않다. 그런 와중에 모리가문이 아닌 인물 중에서 두드러지는게 저 두 인물.


이 양반이 (신장의 야망 12편 혁신에서의)구치바 미치요시

이 양반이 후쿠하라 사다토시


무장으로서는 딱히 쓸모있진 않은데, 지장이자 행정관으로서 쓸모가 많아, 초반에 모리가문이 세력을 넓히는 데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게임중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인물들. 신장의 야망을 워낙 많이 했고, 그 중에서도 모리가문을 제일 많이 혔는디, 그러믄서 모리 인물들은 거의 인이 박히다 시피혔는데...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하기 지도를 들여다보니 구치바가의 옛집과 후쿠하라가의 옛집이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그랴서, 하기에 오면 반드시 이 두 집을 가 보기로 혔구, 앞서 성아랫마을에 들러볼 유신유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 스킵한 것도, 다른 것은 못 보더라도 이 두 집은 꼭 보리라 결심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치바 집앞에 드디어 도착한 것!


앞서 본 평안교도 문화재로서 가치는 높지만, 시지정 문화재에 지나지 않는디, 이 구치바 가옥은 무려 국 지정 문화재, 한국으로 치면 국보에 버금가는 위치다. 일본은 국지정중요문화재를 뽑아놓고, 그 중에서도 일부를 엄선하여 국보로 지정하는 체계라 행정적으로는 국지정중요문화재와 국보가 동격이지만, 아무래도 국보가 지위가 높음은 부정하기 힘들긴 허다. 그렇더라도 국지정중요문화재만해도 충분히 최대급 유물이라는 것. 보존상태가 극히 좋은 정품 에도시대 상급 사무라이의 가옥이니 그렇게 지정된 것.


들어가는 길의 모습들


여기도 신목이 한 그루 놓여있다.


이 곳의 위치가 하시모토강이 일본해(동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에 딱 위치해 있는지라,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일단 도착하거든 강가이자 바닷가에서 경치를 구경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직접 돌아다녀보니 이 무렵엔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난지라, 지치기두 혔구. 그랴서 바닷가이자 강가에 딱 나갔더니 저렇게 또 오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이기에 한방 찍었다.


하구의 모습들. 운치있단 말 쓰기 지겹지만 어떡해 계속 운치있는 걸. 표현력 부족을 탓하시라.


약간의 휴식과 경치감상을 즐기고 가옥으로 오니 이런 처마가 있는게 아닌가. 하물며 비오는 날의 처마. 처마라는 자체의 원래 용도중 하나가 바로 그 비를 피하는 것인데, 비가 오는 날 처마에 앉아 비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도단. 이 또한 한적함의 멋의 극의의 한 장면이기에 또 한번 털썩 주저앉았다.


소위 일본식 정원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야말로 평범한 일본가옥의 마당의 모습일 터. 차분허게 두 손 모으고 앉아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짧은 감동의 시간을 마치고


가옥으로 들어가 보기루 헌다.


단아하고 단정한 가옥이다. 4백년의 세월의 무게가 그 깊이를 더한다.


크어... 일본 전통인형! 이게 또 한 멋 하지. 이 인형단은 히나인형이라고 한다. 원래는 헤이안 시대부터 높은 집안의 자제들이 갖고 놀던 인형인데, 이것이 점차 여자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히나마쯔리(3월 3일)를 기념하며 전시하는 물건이 되어 현재의 일본문화의 한 축에 자리하고 있는 물건이다.


사진에는 7단으로 뒤야 있는디, 전통작법으로는 5단이 기본이다.

어차피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도 얄팍한 나가 설명하는 것보담은

https://global.rakuten.com/ko/event/culture/hinamatsuri/


이 곳을 참조하시는 것이 이해에는 더 도움이 되겠다.


더 많은 히나인형들은

https://www.google.com/search?q=%E3%81%B2%E3%81%AA%E4%BA%BA%E5%BD%A2&newwindow=1&client=firefox-b&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ink92o5NTaAhUDLpQKHfTGC8AQ_AUICigB&biw=2560&bih=1366#imgrc=L7S9G3Swwj0lIM:

여기서 보시길. 중간께에 무지막지한 초거대 히나인형도 있고 그렇다. 몰라 이거 뭐야 무서워...


히나인형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는 이게 은근히 을씨년스러운 무서움이 깃들어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축일에 것도 여자아이의 축복에 쓰이는 물건이긴 하다만... 그건 일본인들 이야기이구... 나는 이 인형을 처음 볼 때부터 뭔가... 좀 무섭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보다시피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형무리인 것이, 무서움에 대한 두려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끌림의 양가감정을 일으켜서 더더욱이나 이 히나인형에 대한 내 느낌을 복잡미묘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 지금도 을씨년함을 느끼긴 하다만, 그 을씨년함마저도 즐기게 된지라 이제는 히나인형을 보는 것은 내게는 큰 즐거움이다.


덧붙이자믄


이 사진은 나가 찍은 건 아니고 퍼온 거...


이거는 아마 일본사람들도 좀 무서워하지 않을까. 노에 쓰이는 가면이다. 이 가면은 특히 여성, 그 중에서도 이승에 한을 남긴 여성을 나타내는 가면이라고 한다. 8백만 신의 나라라 쓰고 귀신천지빼까리인 일본에서 이승과 저승사이의 무엇이란 것은 그들에게도 두려움의 한 원천일테지. 하물며 저렇게 섬뜩하게 만들었대서야, 다른 문화의 사람이 보기엔 기겁하지 않기 힘들게다.


그러나, 이 또한 거기에 담긴 깊디 깊은 어떤 정서가 나에게 공명을 일으키는지, 퍽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중 하나이다.


일본국지정문화재인 가옥안에 놓인 히나인형이니, 어쭙잖은 것도 아니고 명장이 만든 명품일 것인지라, 사실 보는 안목이야 없다만 감회가 정말 깊었더랬다. 그러니 말이 길어지지.


일본 집은 좀 어둡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국 전통가옥은 이렇게까지 어둡지는 않은 느낌이었는디... 일본 사극을 보믄 이 어둑어둑한 방에 촛불하나 켜놓고 그 촛불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마주보는 장면이 나오곤 헌다. 어두운 방에 다다미와 백지바른 문창살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촛불을 두고 오고가는 눈빛과 이야기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곤 하는 느낌.


하기성의 전통시대에 그려진 지도. 누르고 있는 문진이 또한 특색있다.


이 복도... 이 느낌 아주 좋아...


국지정문화재의 품격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가옥이었다.


나오는 길에 히나인형 사진 한번 더 찍고


이건 아부미 - 일본식 등자다. 효게모노 보면 후루타 시게나리가 이거갖고 협잡질 하는 장면이 하나 있었지~


구치바 일문중의 넋이 깃들어 있는 곳에 들러놓고 어찌 구치바 가계도를 담아오지 않을 수 있으리. 보시다시피 구치바가는 단순히 가신이 아니라, 이들 또한 모리가의 먼 방계중 하나다. 물론 노무 멀어져서 계승같은 것을 노릴 처지야 아니게 된지 오래다만. 위에 올린 구치바 미치요시는 가운데 위의 通良을 말하고, 하기번에서의 구치바가 초대는 그 3세손이라고 쓰여있다. 아마 就通나리미치라고 읽는게 아닐까 싶은데...

구치바 가옥을 감상하고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로카베는 항상 가는 길을 지켜주고 있다.


엄청 흔들렸는데도 올린 이유는 여기가 바로 그 다음 목적지이기 때문.


바로 후쿠하라가 하기 가옥터의 문이다. 屋敷라는 것은 집건물을 뜻하는 옥과 그게 펼쳐진 부지를 뜻하는 부(펼 부 자이다)를 합쳐 말하는 것이고, 이 곳에는 이제 건물은 남아있지 않되 문만이 남아있기에 구 후쿠하라가 하기 집터 문이라는 뜻으로 저런 명판이 붙어 있는 것이다.


문은 이렇다. 후쿠하라가는 모리가의 중신중의 중신이었고, 조슈번이 36만석 밖에 되지 않음에도 일문이 아닌 가신으로서 1만 1천석을 받아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기에 문도 웅장허다.


인걸도 간데 없고 築걸도 간데 없는데에 대나무만이 비바람을 맞으며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다.


그냥 빈 터이기만 하다면 좀 덜할텐디, 큼지막하게 솟아있는 문 뒤로 건물은 전부 헐려 없고 그 자리에 나무들만 무성해서 더더욱이나 무상함과 음산함을 두드러지게 했다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이 뒤의 목적지에서 더더욱 증폭된다.

이 사진은 평범한 인근 핵교의 출입문이다. 평범한 출입문인데도 전통양식으로 짓어놓은 게 맘에 들어 찰캌


다음 목적지인 이 곳도 시로카베로 둘러처져 있다.


그 곳은 바로 모리 데루모토 공의 묘소!


모리가의 내력과 모리 데루모토공이란 인물에 대해 적혀있는 안내판이다. 읽어들 보시도록~


입구의 모습. 저 안의 모습에서부터 뭔가 으슬으슬한 느낌이 오지 않는가.

누차 말하지만, 정말 사람이 없어서... 이 으슬으슬한 유적지들을 혼자 다니려니 진짜 귀신들리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날 밤 숙소에서 잠을 통 이루질 못했다. 처음 와서 느끼는 어색함에 체력을 엄청 소모한 피로감, 앞서 배에서 잠을 자지 못해서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이런 을씨년 스러운 것들만 보고 왔는데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이세계 같다는 느낌까지 더해져서 왜 그렇게 무섭던지. 게다가 그날 따라 창 밖에서 이상한 소리도 났다지. 지금 생각해도 그날 밤의 그 느낌은 정말 서늘하기 짝이 없다.


크으... 좌하단의 세 글자


毛利家


가 보이는가. 무려 모리 종가가 직접 관리하는 곳이다. 오네가이 하는 내용은 유지관리를 위해 자율적으로 참배료를 내 주십사 하는 것이다. 옆에 새전함도 있었음. 권장 기부액은 20엔인데... 여기서 또 역사드립이 하나 떠 올랐다. 원래 모리 데루모토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그에게 복속하면서 안도받은 영지는 120만석이다. 그런데, 이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한테 개겼다가 패하면서 36만석으로 줄어든 것이 에도시대의 조슈번이었던 것.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모리 모토나리 공을 존경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신군님도 존경해 마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대인 모토나리 공의 위업을 빛바래게 하고, 주제넘게 이에야스 공에게 대항한 데루모토는 영 못마땅해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20엔이란 숫자를 보고 떠올린 게 너는 120만석의 영지를 날려버렸지만 내가 대신 120엔의 새전을 해 주겠다! 라는 것이었고, 과감히 120엔을 새전해주었다. 낄낄~ 컨셉놀이란 자고로 이 정도는 되어야~~


위에 귀신들린거 같다는 이야기를 혔는디 이 장면도 그에 기여한 장면중 하나. 사실, 앞서의 화 언젠가에서도 말혔듯이 일본은 한국에 비해 생태레벨이 높고, 한국에서 비둘기으 위치를 까마귀가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까마귀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인 것. 근데, 하필이면 그걸 묘소에서 본거다. 비오는 날 아무도 없는 묘소에서. 마치, 네 놈이 나를 능멸하느냐? 너 좆되봐라, 하고 데루모토 공이 보낸 사자와도 같지 않은가? 분명 이 날 내가 귀신들린 건 이 놈 때문임에 틀림없다.


어쨌건 나는 새전을 혔으니 데루모토공을 참배하러 들어가 본다.


꽤나 크게 만들어진 것은 역시 조슈번의 창시자이기 때문일 것. 언젠가 도조다이곤켄사마(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소도 가 볼 것인데, 거기는 여기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이쇼 14년이란 숫자가 보인다. 그니까, 조슈번이 유신을 성공시킨 이후에 이렇게까지 묘역이 정비되었다는 것. 당연히 유신을 성공시킨 중추인데 대우가 나쁠리가. 물론 그게 묘역을 이만하게 지은게 다이쇼 시대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이쇼 시대에 저 비석에 써 있듯이 종2위 관직을 제수받은 것임을 알리는 것인지까지는 모르겠다.


네 눈에는 이 나가토 미쓰호시 문장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미토 코몬 흉내좀 내 봤다~


이제 이 세계를 떠나 현 세계로 돌아갈 시간. 사실 나가봐야 거기도 일본이니 어차피 이세계이다만 말이다.


이 날 여러 곳이 다 인상깊었지만, 나으 일본취미으 여러 면과 결부되어, 바로 이 모리 데루모토공의 묘야말로 정점을 찍은 장면이었다 할 수 있겠다. 모리 데루모토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평범한 묘소일 뿐이었겠다만. 이래서 취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건디, 내 지인중엔 전국시대기호가 깊은 인물이 없어...


이제 이 날으 마지막 목적지인 지월산을 향해 갈 때이다.


앞서 말씀드린 川船크루즈의 선착장이다. 배는 철수하고 없다. 이를 타보기 위해서라도 지금 만약 다시 일정을 짠다면 반드시 하기를 2일 넣을 것이겠건만.


시즈키 산으로 가는 시즈키교.


이 것이 하기성 혼마루를 지키는 해자이다. 도쿠가와의 쓰레기 잡병따위는 10만명이 몰려와도 막을 수 있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의 입구에 모리 데루모토 공의 동상이 서... 아니 앉아있다. 그러게, 킷카와 지주(친 도쿠가와파. 2부인 이와쿠니이야기하면서 자주 듣게 되실거다)의 말을 들어야지 왜 안고쿠지 에케이(친 도요토미파)같은 놈의 말을 들어갖고 이 모양이냐... 결과적으로 역사의 승자가 되긴 혔다만, 그건 후손들이 승자인거지 본인이 승자인건 아니니까.


이시가키들의 위용이 상당허다. 도쿠가와의 허접군사 따위는 20만명이 몰려와도 다 쳐죽일 수 있다.


진짜 하기본성의 성터. 많은 건물들이 헐려나갔다. 정확한 사연이야 알 수 없다만 추측해보자믄, 조슈번은 막말기에 번청을 이곳 하기에서 현재의 야마구치 현청이 있는 야마구치 시로 옮겼다. 그 당시까지만혀두 어쨌건 1국 1성령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니, 번청을 옮기면서 이 곳의 성은 헐어야 혔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저 기단이 바로 혼마루의 천수각이 있던 곳이다. 천수각이 서 있었다믄 을매나 멋졌을까. 복원이라도 할 법헌디, 복원도 안뒤야 있다. 쫌금 이해가 안 간 부분.



더러운 도쿠가와의 개들은 30만이라도 개패듯이 갈아버릴 수 있는 이 위용을 보라



원래라믄 입관료를 내야할 것이나... 문 닫는 시간이 18시인디 이 때는 이미 17시 30분도 넘은 시점. 관리하시는 분도 퇴근하신 거 같아 210엔 굳었다. 새전함이라도 있었다믄 나는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유신의 심장이 따듯한 진정한 일본인이니까, 자발적으로 냈을테지만, 아쉽게도 새전함이 없더라.


성안에는 しづきやまじんじゃ시쯔키야마 신사가 있다. 보다시피 메이지 시대에 세워진 신사. 사실 이번에 다니면서 보니까, 신사들이 굉장히 유서는 깊은데, 정작 지어진 시기를 보면 메이지 다이쇼인 경우가 많더라. 물론 이 지도기산신사는 진짜 메이지시대에 세워진 거 맞음. 모리 모토나리공, 모리 데루모토공, 모리 다카치카(유신 당시 조슈번주)공을 기리는 신사이다.


이 때쯤엔 진짜 살...려...줘... 소리가 날 정도로 체력이 퍼져있는 상태여서... 진짜 들어가서 보고만 나왔다. 아 당연히 신사참배는 혔구. 모리의 선현들에게 당연히 예를 표해야 허지 않겠는가.


원래 최종목적은 바로 저 지월산에 등산하여, 거기서 일본해(동해)의 낙조를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늦을대로 늦고 보다시피 하늘은 흐릴대로 흐린데다, 체력은 바닥날대로 바닥나서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읎었다. 곧 공원이 문 닫을 시간이라 나가야 하기두 혔구.


하지만 스바라시한 날에 저기서 낙조를 본다믄 실로 장관중으 장관이지 않을까 싶긴 허다. 언젠가 또 와볼 날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하기 성 안녕~~


하기성의 북문밖으로 나오니 펼쳐져 있는 모습. 해자가 그대로 일본해(동해)로 이어져 있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인 특유의 스케일 큰 이상주의를 잘 보여준달까나. 물론 나도 바라는 바이기에, 일본해(동해)를 아우르는 두 나라의 우정을 위해서라도 합장하고 사진 찍었다.


지월산도 안녕... 지금 보는데도 새삼 뭉클해진다...


동네가 동네다보니 절이 참 많다... 라기엔 원래 일본은 어딜가든 이렇게 절이 많음. 동경같은 진짜 대도시는 안 가봐서 모르겠다만. 후쿠오카가 나가 가본 제일 큰 도시긴 헌디, 말 그대로 스치듯 안녕혔을 뿐이라.


소소한 귀여움들.


저녁은 마트에서 따쉬락과 스시와 과자를 사다 묵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디, 진짜 어린애 팔뚞만한 네기토로 마끼를 팔더라. 근데, 거기에 붙은 수식어가 노무 일본스러워서 웃었다. 이름하야


極太ネギトロ入り巻


극태네기토로이리마끼

극태랜다. 낄낄~~ 나가 자주다니는 씹덕싸이트가 있는디, 거기서 떡인지에서 가녀린 주인공을 범하는 중년 아조시들을 극태중년이라 칭하곤 하는 것을 보고 괜히 웃기다 싶어 낄낄거리곤 혔는디, 그게 본토에서 진짜 쓰는 표현일줄이야... 극태 네기토로 마끼한테 위장을 범해지며 이날 하루으 일정을 마쳤다.


지금 보니 끔찍하게 기네... 만약 어제 다 쓸라고 혔으면 토했을 듯. 오늘 편도 사실 둘로 갈라야 맞을 정도로 긴 거 같은데 말이다.


앞으론 보다 적당한 길이로 더 자주 올리는 걸로 혀야긋다. 이렇게 길대서야, 어차피 읽는 사람도 벨루 읎지만 읽을라고 맘 먹은 사람도 무서워서 도망가긋다. 하튼 이로서 드디어 하기에 관련된 이야기가 마감되었다. 1부가 드디어 끗~


다음화부터는 2부 이와쿠니 편으로 넘어간다.


8화에서는 이만큼을 이동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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